3D 프린터로 키보드를 뽑아볼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아크릴로 뽑을 수 없는 디자인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물론 알루미늄보다 가격이 더 쌀 것 같고요. 잘만 뽑으면 완성도도 높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내에도 3D 프린팅 업체가 몇 군데 있더라고요.
오후에 이 책을 읽으면서 3D 프린터를 질러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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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나 돌을 깎는 데는 한계가 있다. 쇠는 수직으로 깎을 수밖에 없고(이를 테면 CNC 밀링머신은 수직면 내부에 수평으로 홈을 팔 수가 없다) 돌은 잘 부서지기 때문에 세밀하게 깎기 어렵다. 플라스틱으로 뭔가 만들려면 먼저 금형을 만들어야 하는데 금형을 만드는 가격이 어마어마하다. 디자인을 조금이라도 고치려면 금형을 통째로 새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3D 프린터로 뭔가를 뽑아내려면 컴퓨터로 도면을 수정해서 Ctrl+P만 누르면 된다.
3D 프린터로 총을 뽑을 수 있게 됐다고 해서 한때 떠들썩하기도 했지만 3D 프린터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다. 가까운 미래에 3D 프린터로 알약을 출력해서 먹는 그런 시대가 올 수도 있다. 그때가 되면 알약을 파는 게 아니라 알약의 구성 성분과 함량을 담은 파일을 DRM(디지털 저작권 관리) 워터마크를 붙여서 아마도 출력 회수 제한을 걸어서 팔게 되지 않을까. 약국에서 파는 비타민과 똑같은 비타민을 집에서 만들어 먹게 될 거라는 이야기다.
그때쯤이면 스마트폰 케이스 정도는 직접 디자인해서 쓰게 되지 않을까. 공개된 디자인 파일을 수정해서 이니셜을 집어넣는다거나 잘 만든 디자인 파일은 돈을 받고 팔 거나, 심지어 스마트폰 카메라로 3D 스캐닝을 해서 도면을 만들고 어떤 제품을 그대로 복제하는 일도 가능하다. 열쇠고리나 컵이나 애들 장난감 같은 건 이제 집에서 만들어 쓸 수 있게 된다. 3D 프린터용 도면 시장이 생겨날 거고 그만큼 해킹이나 불법 복제가 늘어날 가능성도 크다.
얼마 전에는 3D 프린터로 출력해서 조립할 수 있는 오픈소스 카메라가 소개되기도 했다. 도면이 오픈소스로 풀려 있기 때문에 3D 프린터만 있으면 재료 값을 포함, 30만원 안쪽에 리플렉스 카메라를 뽑을 수 있다. 영국에서는 3D 프린터로 소형 비행기를 제작한 사례도 있다. 미국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는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들을 3D 프린터로 출력한 복제품들로 대체해 전시하고 있다.
커피포트의 손잡이가 부러졌다면 커피포트를 새로 사야겠지만 집에 3D 프린터가 있다면 적당히 만들어 쓰거나 이미 공개된 도면을 가져다가 출력할 수 있다. 씽기버스라는 3D 프린터용 도면 공유 사이트에는 커피 포트 손잡이부터 시작해서 공룡 뼈대 모형이나 레고에서 팔지 않는 독특한 형태의 블록을 만들 수 있는 도면이 올라 있다. 얼굴 사진을 집어 넣으면 3D 인형으로 만들어주는 버블헤드샵 같은 업체들도 있다.
3D 프린터로 만들 수 있는 3D 프린터도 있다. 영국 바스대의 아드리안 보이어 교수가 공개한 3D 프린터 도면으로 부품의 60%를 만들어 낼 수 있다. 350파운드, 우리 돈으로 62만원만 있으면 된다. 자기 복제라는 의미의 렙랩 프로젝트라는 것도 있다. 보이어 교수는 모든 도면을 오픈소스로 공개하고 있다. 렙랩 프로젝트에서 출발한 얼티메이커라는 완제품 3D 프린터는 1500달러 수준이다.
물론 수준 높은 3D 프린터는 상당한 가격이다. 전통적인 프린터 메이커 휴렛팩커드가 만드는 디자인젯3D는 2만1000달러 수준이다. 3D 프린터는 특수 고분자 물질이나 금속 가루를 뿜어내 0.01~0.08mm의 얇은 막을 쌓아올려서 제품을 만들어 낸다. 3D 프린터의 성능은 얼마나 오차 없이 정밀한 분사가 가능하느냐에 달렸다. 저가 3D 프린터의 경우 적층된 표면이 상대적으로 매우 거칠다.
3D 프린터의 원료로는 ABS와 PLA 등 열가소성 수지가 사용된다. ABS는 냄새가 나고 잘 휘어지지만 레고처럼 튼튼하다. PLA는 와플 같은 냄새가 나는데 자연 분해가 되는 친환경 플라스틱이어서 가격이 좀 더 비싸다. 가까운 미래에 철을 녹여서 물건을 만드는 3D 프린터도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HP 등이 프린터를 싸게 팔고 잉크 토너로 돈을 벌었던 것처럼 3D 프린터를 대여하고 원료로 돈을 버는 모델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건설용 3D 프린터 시장도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덩치가 훨씬 크고 플라스틱 대신 모래나 콘크리트를 분사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보통 건축 기법보다 4배 빠르고 비용도 3분의 1에서 절반 수준 밖에 안 된다. 건축 폐기물도 거의 안 나온다. 태양열을 이용해 사막에서 모래를 분사시켜 액체 고착제로 굳혀서 건물을 만드는 솔라신터프로젝트는 3D 프린터를 이용한 적정기술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3D 프린터는 소셜 제조업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냈다. 쿼키라는 사이트에서는 10달러만 내면 아이디어를 등록할 수 있는데 이 아이디어가 채택돼서 3D 프린터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게 되면 10~12%의 수익금을 배분하게 된다. 한 고등학생이 제안한 관절이 달린 전원 콘센트, 피봇 파워는 20만대 이상이 팔렸다. 이 고등학생은 12만4000달러를 벌었다. 3D 프린터는 이처럼 다품종 소량 생산의 시대를 가능하게 한다.
앨빈 토플러는 일찌감치 2006년에 펴낸 ‘부의 미래’에서 “3D 프린터는 상상하는 아니, 상상하지 못했던 그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고 전망한 바 있다. 최근 출간된 ‘3D 프린터의 모든 것’에서는 “3D 프린터가 기존의 제조업 공장의 생산 방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겠지만 한편으로는 심각한 저작권 분쟁을 불러올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 책은 “3D 프린터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에 필적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분명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참 놀라운 세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