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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날씨가 선선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날이 덥고 습하네요.
입에서 욕나오는...날씨가 계속이네요-.-;;;
전에 잘때 이불을 안 덮으시는 분들이 많으시던데...
겨울에도 이불을 안덮고 평생을 지낸 사람도 있는것 같더군요.
무애도인(無碍道人)이라 불리는 한 스님의 이야기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춘성(春城)(1891~1977)은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였는데요.
강원도 출신으로 13세의 나이에 출가를 하여 만해 한용운에게 사사하였고, 송만공의 문하에서도 사사하였습니다.(이하 존칭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평생 잠을 잘 때 이불을 덮지 않고 잠을 잤는데요.
이유는 이불이 이불(移佛) 또는 이불(離佛)이라 하여 부처와 불심에서 이별(離佛)하게 하는 것'이었기 떄문이라고 합니다.
춘성스님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욕을 많이 하신 분이 아닐까 하는데요.
그중에 몇가지 일화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제시대에도 버스와 전차, 기차에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극렬 기독교인들의 선교가 기승을 부렸는데요.
총독부 당국조차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경찰이 체포하려고 하면 이를 외국에 알려서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를 종교의 자유도 허용하지 않는 옹졸한 존재로 몰고가 일본을 난감하게 만들었기 때문인데요.
하루는 경성부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데 어떤 기독교 전도자가 버스 차내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피켓을 들고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이 기독교인이 일부러 승복을 입고 있는 춘성스님 앞으로 와서 더욱 큰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춘성스님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부처는 죽었지만 예수는 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라며 예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춘성스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야 이놈아 너는 그럼 내 좆을 믿거라! 예수는 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내 x는 매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면, 골백번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내 고추를 믿으면 구천번 이상 구원을 받지 않겠는가!"
그러자, 승객들은 폭소를 터트리고, 기독교 광신도들은 아무말도 못하고 혼비백산 차에서 내렸습니다.
일제 강점기 후반인 태평양 전쟁 무렵에는 산에 나무를 벌채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돼었는데요.
방이 차갑고 냉골이라도 아무도 불을 떄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춘성스님은 망가진 절을 보수할 겸 땔깜을 만들려고 직접 산에서 나무를 베다가 영림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게 연행되어 간적이 있었습니다.
파출소에 잡혀온 춘성스님에게 형사가 주소를 묻자, 춘성은
"우리 엄마 보ㅇ 다"라고 대답했다. 경찰은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또 물었습니다.
그래도 같은 대답을 하자, 이번에는 질문을 다르게 했지요.
본적이 어디냐고 묻자 춘성스님은...
"우리 아버지 자ㅇ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여 춘성스님을 실성한 사람이라고 여겨 돌려 보냈다고 합니다.
한편, 춘성스님은 만해 한용운의 제자로, 한용운이 감옥에 갇혔을때 절의 재산을 팔아 한용운을 도왔다고 하는데요.
만해 한용운이 "부처님의 재산을 너가 함부러 처분하느냐면서 너는 더 이상 내 제자가 아니다" 라고 하자,
그 후로 "나에게는 스승님이 계시지 않습니다"라고 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춘성스님은 '스승'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깨뜨린 사람이 아닌가 싶은데요.
어느날 강론을 하는도중,
절벽에서 나뭇가지를 놓을수 있는 자야 말로 대장부라며
백범 김구의 일화를 소개하며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철수장부아'(得樹攀枝無足奇 縣崖撤手丈夫兒, 나뭇가지를 잡아도 발에는 힘주지 않고, 언덕에 매달려도 손에 힘주지 않는 것이 대장부다.)라는 주제로 법문을 설파할 때였다.
그런데 절벽에서 떨어지면 죽는다는 것만 생각한 어느 수행자가
법문이 끝난 뒤 춘성 스님을 찾아와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발을 더 내디면 그 다음 경계는 어떤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춘성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야 이 자슥아, 내가 떨어져 봤어야 알지."
일화를 좀더 소개하면,
박정희가 대통령 재임시절, 독실한 불자였던 육영수의 방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춘성스님은,
"우리 뽀뽀나 한번 해볼까?"라고 하여 불 자들과 수행원들을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농담을 잘 알던 육영수는 웃으면서 그의 농담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법문이 하나 있는데요.
한번은, 춘성이 육영수의 생일에 초대되어 청와대에 간적이 있었는데요. 그자리에서 박정희와 육영수가 특별히 법문을 청하자,
춘성스님은 마이크 앞에서 아무런 말도 않고 잠자코 있었습니다.
30분이 경과한 후, 참석자들의 인내심이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 춘성 스님은 법문을 설파했습니다. 그 중에 한마디는...
"오늘은 육영수 보살이 지 애미 보ㅇ에서 응아하고 나온 날입니다"
듣고 있던 참석자들은 영부인의 생일에 한 이 법문에 놀라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어쩔 줄 몰라하였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웃으면서 대단하신 분이라고 격찬하기도 하였습니다.
은퇴후 춘성은 망월사로 내려와 여생을 보냈는데요.
망월사를 찾은 선승들이 보는 것은 파계요 듣는 것은 욕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였는데요.
춘성스님은 평소 녹차와 막걸리를 즐겨 마셨는데, 곡차라 하면 마시고 술이라 하면 마시지 않았습니다.
춘성 스님은 한벌의 가사와 모자만이 전재산이었는데요.
춘성스님이 입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젊은 상좌가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열반에 들어 다비를 하고 난 후, 스님의 사리가 안나오면 신도들일 실망할텐데요?"하자,
"야 이 시발놈의 자식아! 내가 신도들에게 보여주려고 사느냐?"
춘성은 "내가 입적한 후에라도 절대로 사리를 찾지 말고, 비석과 부도도 세우지 말 것이며, 오직 수행에만 힘쓰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간소하게 장례를 치룬 뒤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달라 유언하였는데, 그의 장례식때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도올 김용옥은 TV에서 춘성스님의 육두문자를 그대로 인용하여 물의를 빚기도 하였는데요. 결과적으로 TV에서 욕설이 허용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전, 오늘 이불을 덮고 잘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