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때와 같이 저녁식사 후 운동하러 갔습니다.
간단히 몸풀고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원투자세를 거울보며 가다듬으려다가 사범님의 콜이 있었습니다.
마침 진도 비슷하게 나가는 사람들이 4명 정도 모여서, 각 파트너를 짜고 메도우를 시작했습니다.
첫 라운드는 저와 키큰분과 경기 였습니다.
상대방 신장은 약 183~5cm, 신장이나 리치나 저에게 완전 핸디캡이었습니다. 주먹을 뻗어도 위로
올려쳐야 하고, 낮은 시선에서 상대방 어깨를 읽기도 많이 불편하더군요. 그러나 파트너가 메도우
경험이 거의 전무한 상태라 저를 때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빨라서 못때리는 것이 절대 아니라
마음이 너무 착해 상대방을 때릴 생각을 안하는 듯 하더라구요. 제가 처음 입문해서 비슷하게 해왔던
지라 어떤 마음인지 십분 이해가 됬습니다.
그러나 때려보고, 또 맞아봐야 실력이 느는 것이 복싱인지라 서로를 위해 강하게는 아니더라도 쭉 뻗어
때려주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데 아직 이 점을 숙지하지 못하신 것 같았습니다. 그럭저럭 2라운드를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 다음 파트너는 저보다 신장이 5cm 작은 분이었습니다만, 제가 팔이 짧아 리치는 비슷합니다. 아니,
되려 허리를 잘 쓰고 어깨를 뽑을 줄 알아 타격시 리치는 저보다 길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분과는
전부터 자주 메도우를 해서 나름 연구책을 마련했었습니다.
맨날 쥐어 터지며, 이렇게 하면 쳐맞는구나, 이렇게 하면 코피가 나는구나, 이렇게 하면 입술이 터지는구나
하며 몸으로 깨닳아 익히곤 했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이분은 스텝이 느린 것을 인지하고, 최대한
(되지도 않는) 스텝을 밟아가며 치고 빠지고 빠른잽과 스트레이트, 그리고 카운터 훅, 가끔 섞어주는
바디블로로 처음에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처음 기선제압을 해버리니 나중에는 먼저 들어오지를
못하더라구요.
과거 잠시 검도를 했던 것이 복싱에서도 유용하게 될지는 몰랐습니다. 검도와 복싱은 스텐스가
정 반대라 (앞서 있는 발의 좌우가 다른지라) 복싱 배우는데 방해만 될 줄 알았는데, 각종 훼이크와
심리전 효과가 효과를 조금 보는 듯 하더라구요. 여튼 이분과 연장 4라운드를 뛰었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이분이 헤드기어를 벗었는데 이마가 부어 있었습니다. -ㅅ-)
강하게 치지도 않고 주먹도 쥐지 않았으며, 턱을 치면 조금이나마 뇌에 손상이 갈까봐 이마와 관자놀이만
때렸는데 되려 그게 악영향을 끼친 것 같네요. ㄷㄷ
우야뜬 4라운드 내내 우위를 점하긴 했는데, 어설프게 빨라지려고 몸은 경직되어 힘이 잔뜩 들어가고, 헤드기어와
마우스피스로 호흡곤란 현상이 점점 심해지더군요. 뭐 기초체력이 바닥을 기는 것은 말할 여지도 없습니다.
이런 스스로의 실력을 망각하고, 한번도 배워보지도 않은 근접타를 해보겠다고 허우적 대며 붙었다가
제가 고개 숙이던 찰나 어퍼컷을 제대로 맞았습니다. 근데 이분이 많이 맞아 열받으셔서 작정을 하신건지
주먹이 매우 무거웠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ㅜ.ㅜ)
근데 하필이면 그 어퍼컷 한방이 헤드기어 코 빈 공간을 찾아 깊숙히 들어왔습니다. '쿵'하며 뭔가 노란별이
번쩍이더니, 코 밑 인중에 통증이 몰려왔습니다. 기분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잠시 쉬며 거울을
보니 마우스피스 안으로 피가 콸콸 흐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윗 이빨 앞니가 치열이 고르지 않아 신경이 쓰였는데
아차! 했습니다. 장비를 풀고 거울을 보며 이빨을 흔들어보니 별 통증이나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피가 멎지 않아 윗입술을 뒤집어 보니, 뭔가 끊어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윗입술 안쪽과
잇몸이 연결되는 부위 정중앙에 물갈퀴 처럼 가느다란 선으로 연결된 부분이 있는데 (의학용어로 어떤 부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이 완전히 끊기고 그 공간에서 피가 계속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ㅎㅎ
통증은 미약하나 이거 뭔가 중요한 신경이나 혈관 아닐까 괜한 걱정이 잠깐 되긴 했지만 이것 가지고 죽기야
하겠냐 생각했습니다. ㅎㅎ
복싱 참 묘한 스포츠 같습니다. 검도 할때도 이렇게 즐겁지 않았는데, 그냥 집 근처 복싱장에서 살이나 좀 빼보자
시작했던 것이 이렇게 중독성이 강한 줄 상상도 못했습니다. 돈내고 혼나며 뚜드려 맞고 피흘리며 즐거움을
느끼다니;;; 저 변태 아닙니다. ㅎㅎㅎㅎㅎ
여튼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 하고 욱씬거리는 윗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일반 헤드기어가 아닌 안면 전체를 보호할 수 있는 헤드기어도 주문해놨으니, 다음에는 부상없이 메도우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줄요약 - 6라운드 내내 우위 점하는 척 설레발 치다가 막판 한대 쎄게 맞으니 오라지게 아프더라.
짤방 영상은 퍼넬 휘테커 선수의 피하기 스킬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