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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조지오웰의 1984를 완독했는데 전체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식견을 넓혀주더군요.
(언론탄압등으로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빅브러더는 1984에서 나오는 상징적인 단어)
그나저나 마르크스란 인물에 대해 뜬구름만 잡았을뿐 정작 아는건 없었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기사 같습니다.
마르크스의 저작들이 명확한 표현보다는 좀 두리뭉실하게 쓴 부분이 많아서 해석의 여지가 좀 큽니다. 그래서 다양한 공산주의 모델들이 나타났던 거겠죠.
'자본'에도 공산주의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습니다. 단지 자본주의 시스템을 분석해 놓았을뿐. 역시 마르크스의 주장의 요지를 모아놓은 저작은 '공산당선언'이 아닐까 합니다. 분량도 적고 다른 공산주의 사상가(?)들에 비해 마르크스는 글을 흥미진진하게 쓰는편이라 요것부터 읽어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이런 책은 키보드를 팔아서라도 사서 봐야.
졸면서 보면 한 1년 걸리죠. 빌려서는 1독이 어려울 것 같아서.
키보드는 빌려서 쳐보고, 책은 사서 봐야죠. 이런 책은 팔아주어야죠.
그리고 박노자 칼럼이 생각나서 옮겨봅니다.
주제는 교육에 관한 것이지만 타치한 마르크스에 대한 이야기는
기억이 생생해서요.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말 잘 안 듣는 아이'를 위하여
2006년 2월 28일
어린시절 필자에게는 한 가지 헷갈리는 일이 있었다. 늘 선생님들은 부모 말을 잘 듣는 아이가 착한 아이라고 말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당시 ‘사회주의 국가’의 청소년이 존경해야 할 사람인 카를 마르크스의 평전을 읽었을 때 그의 삶은 ‘착한 아이’의 모습과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들도 ‘잘나가는’ 법률가가 되기를 기대했던 아버지의 바람을 저버린 채 젊은날을 ‘쓸모없는’ 철학 공부로 보냈다가 빚더미에 앉은 망명객이 돼버린 아들을 보고 어머니가 “〈자본론〉을 쓰고도 자신의 자본은 못 만들었다”고 한탄하지 않았던가? 마르크스의 그러한 ‘탕아 행각’도 만만치 않았지만 부모의 허락도 없이 급진파 유대인과 약혼함으로써 집안에 ‘불명예’를 안겨준 그 부인 예니의 행동 또한 불효막심이 아니었던가? 예니의 이복오빠가 독일 내무장관이 되었어도 예니는 망명지 런던에서 태어난 아이의 요람을 살 돈이 없었고, 아이가 일찍 죽어도 관을 살 돈이 없었다. 그럼에도 탕아들끼리 평생 그렇게도 행복했다는 것이었다.
150년 전의 유럽 유산층에서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길로 가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일처럼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옛날 사람들은 월인천강, 하나의 달 그림자가 천 개의 강에 비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이 사회의 이데올로기인 경쟁주의·출세주의는 부모의 마음에 내면화해 가정마다 ‘학업 장려’와 같은 미명 아래 자행되는 폭력의 원동력이 된다. 아이에게는 자기 스스로의 꿈을 꾸어볼 여유도 없이 부모의 꿈은 곧 아이의 꿈이 되고 만다. 입시 전쟁에서 패배하면 ‘불쌍한 무능아’ 아니면 ‘부모의 은혜에 보답 못하는 배신자’가 되는 줄 알고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는 ‘전쟁 준비’에 몇 해를 허비하는 것은 기본이다.
꼭 그걸로 끝나지도 않는다. 서양음악을 아이에게 시켜야 상류층이 된다는 ‘통념’을 익힌 부모들이 “신분 상승을 도모하라”는 사회의 절대명령대로 음악과 별 인연도 없는 자녀에게 악기 공부를 무리하게 시키는가 하면, “조기 유학을 안 보내면 안 된다”는 새로운 ‘상식’대로 부모 곁을 떠날 마음도 없는 불안한 아이들을 억지로 이역으로 떼어 보낸다.
사회가 강권하는 이런 폭력의 결과는 무엇일까? 평생토록 부모에 대한 원망의 씨앗이 될 수도 있고, 아이의 심신을 파괴시킬 수도 있으며, 또 나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찾아내 사고하거나 표현할 줄 모르고 남을 따르기만 하는 세대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부모가 시키는 대로 살고 싶지 않은 아이가 작은 개발독재와 같은 ‘가국’(家國)에서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인격을 지키고 싶다면 과연 어디부터 어디까지 가능하겠는가? 뜻이 굳건한 사람에게 불가능은 없겠지만 그에게는, 효도를 아직도 엄숙한 최고 덕목으로 주입시키는 사회에서 150년 전에 카를과 예니가 겪은 고뇌보다 한층 더 심각한 고통이 따를 것이다. 역설이지만 마르크스주의자임을 내세우는 부모라 해도 자신의 자녀가 마르크스처럼 행동할 경우 마르크스의 아버지보다 더 강경하게 대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수능날에 시험장에서 벽이나 문에 기대어 열심히 기도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볼 때 필자는 감동되기는커녕 답답해서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내 아이가 암기 경쟁에서 남을 잘 눌러 올라서서 승리하기를” 예수님이나 부처님에게 기도하기보다 오히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하셨듯이 (부모의 의도가 아닌)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도록 기도하는 것이 진정 종교가 아닌가.
(언론탄압등으로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빅브러더는 1984에서 나오는 상징적인 단어)
그나저나 마르크스란 인물에 대해 뜬구름만 잡았을뿐 정작 아는건 없었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기사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