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가 도착했다는 이야기만큼 설렌 이야기를 일상에서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니, 엄밀히 이야기 하면 그보다더 훨씬 더 사람을 설레게 하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별 거 아닌 것 가지고도 설렘을 느끼게 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해야겠습니다.
박스를 뜯고, 그 안의 완충재를 헤치니 조립이 된 그 녀석이 살며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다른 능력 있으신 분들과는 달리, 저는 초등학교 이후로 인두기도 제대로 잡아 본 적이 없고 키매냐와 OTD를 다니면서도 키보드 조립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고 당분간 해 볼 생각도 없는, 말하자면 '야매' 동호인입니다. 어디가서 키보드를 취미라고 하기에는 부끄럽습니다. 여하간 조립을 맡겼던 456GT가 제 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신품 흑축 스위치로 조립을 했습니다. 신품 리니어 스위치의 서걱거림에 대해 이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 많은 것은 알고 있고, 이것 때문에 상태가 좋은 스위치를 찾아 머나먼 여정을 달려온 것에 대해서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제게는 서걱거린다는 것이 큰 약점으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물론 서걱거리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기는 합니다).
스프링의 압력은 차등 압력으로 순정 흑축 스프링, 62G, 59G, 55G의 4가지가 사용되었습니다.
애초에 Model M의 철컹거림과, 체리 청축의 짤각거림과, 체리 논클릭 스위치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도 다 나름의 매력으로 좋아하니 정숙하면서도 약간의 서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거슬리지 않기 때문에 그럴 것일지도 모릅니다.
보강판은 456GT 공제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황동 보강판입니다. 꼭 이걸 바라고 조립을 부탁드린 것은 아닌데, 어떻게 인연이 되어서 한장 얻게 되었습니다. 456GT의 바닥에 있는 두 장의 황동키와 어우러져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고 혼자만 생각합니다. 겉면은 사포질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독특한 무늬가 있습니다.
그라파이트 키캡을 꽂았습니다. 하우징이 검은색이니 검은 이색을 꽂았으면 좋았겠지만, 제게 완품으로 한 벌이 없었습니다. 돌치 키캡은 몇몇 키캡에 문제가 있지요(비록 돌치 무글킷도 있지만). 돌레 같은 것은 없는 물건이고... POM 무각이라도 한 벌 구해 놓을 것을 그랬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투용으로 그라파이트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남성적인 색채를 띄고 있기에 검은색 456GT와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OTD 키캡은 예전에 키보드 거래를 하면서 받은 물건입니다. 성신여대역에서 얻은 물건이지요. 제게 있는 몇 안 되는 OTD의 상징이 새겨진 물건입니다.
헝그리하게 카메라를 쓰고 있는 사용자라서 아직 스트로보도 없고, 렌즈도 조리개 문제로 어둡습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탈 때 쓰는 라이트를 위에 매달고 한 번 찍어 봤는데, 연극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색감은 영 아니네요.
키캡 사이로 어른어른 보이는 황동 보강판 덕분에 원래 공제품에 있던 붉은 보강판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입니다. 특히나 검은색 456GT의 그 표면 질감은 만져본 사람만 알 수 있는 독특함이 있지요.
저 표면 질감은 어떻게 말로 표현을 할 수도 없네요.
저 공격적인 측면 경사각 때문에 스포츠카가 연상됩니다. 그런데 이름의 유래가 된 456과는 달리 제가 연상하는 모습은 각진 람보르기니 입니다.
사연이 없는 물건이 없지만, 제가 가진 키보드 중에서 456GT 만큼 사연이 많고 여러 가지 의미가 많이 담긴 것도 드문 것 같습니다. 그것을 글로 풀어내기에는 여러 가지로 상황이 복잡하고 얽혀 있어 쉽게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끝으로 공제에 수고하여 주신 응삼 님 및 그 외 많은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그러고보면 제가 참 많은 분들의 덕을 입었습니다.
멋집니다.